[동국스님 칼럼] 대부도 향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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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스님 칼럼] 대부도 향리지
  • 다문화방송신문
  • 승인 2024.03.07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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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방송신문 발행인 동국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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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도에 정착한지도 어언 십 수 년이 지났다. 대부도에 들어오려면 301번 지방도를 타야 한다. 시흥을 기점으로 대부도의 선산인 황금산(黃金山)을 통과하여 남쪽 해안가를 휘돌아 화성까지 닿는 도로다. 301번 지방도가 끝나면 또 다른 길이 이어진다. 가까운 길부터 떠나면 모든 길은 다 이어진다는 말이 있다. 길은 끝도 없이 이어진다.

우리 인생이 끝없는 여행인 것처럼 말이다. 32일 동안 800킬로미터를 걸어야 하는 산티아고의 순례자들은 길을 걷는 가운데 문득 이런 생각을 한다고 한다. “나는 왜 여기에 있지? 이건 참회의 행위야.” 


무려 11.2킬로미터에 이르는 시화방조제는 해탈교(解脫橋)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속세를 벗어나 섬으로 들어가는 다리이기 때문이다. 고대인들에게 물을 건넌다는 것은 큰 모험이었다. 섬은 바다로 가로막혀 있어서 죄인들이 숨거나 수도하기에 딱 좋은 장소인 것이다. 번뇌와 인연을 털고 새 삶을 살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좋은 섬이다. 


대부도는 인천 앞 바다에 있는 외딴 섬이었다. 황금산은 산 중심에 있는 언덕인데, 화성시 남양반도에서 보면 큰 언덕 같다고 해서 대부도(大阜島)라 불렸다. 이 산을 중심으로 구릉성 산지들이 사방에 뻗어나간다. 선사시대 유물을 통해 학자들은 고대인들이 배를 타고 섬에 건너와 사냥이나 원시농경 생활을 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유물은 대개 굴 껍데기 패총과 빗살무늬 토기가 많고 차가운 바람을 막아줄 구릉을 뒤로한 양지바른 남향 터에 자리 잡고 살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13세기, 몽고의 영토 확장전쟁이 시작되자 고려에서는 농민과 천민 중심으로 대몽항전이 일어났다. 그러나 고려정부는 몽고에 굴복하고 말았다. 지금의 경찰과 같은 삼별초는 그런 정부에 반항하여 대몽항쟁을 계속했다. 대부도에서 발견된 고려 석관묘(石棺墓)들을 보면 삼별초와 지역주민들이 몽고항전을 벌인 것으로 짐작된다. 대부도에서는 대몽항전 민중봉기가 일어났고 이 섬에 주둔해있던 몽고군들을 살해하기도 했다. 


세롱실록에 보면 이렇게 적혀 있다. ‘화지량(花之梁)에서 서쪽으로 2리 떨어지고 섬 길이가 30이요 너비는 15이다. 경기좌도선군영과 100여결의 전이 있다. 국마 418필을 방목하였는데 염부(鹽夫) 4호가 들어가 그것을 돌본다.’ 즉, 100여 결(結)에 달하는 토지와 말을 사육하는 목장이 많았다는 것이다. 화지량은 경기수영의 관할로 남양부의 서쪽에 위치하여 수군 방어를 책임지는 곳이었다. 


돌을 캐던 대부광산의 퇴적암층과 공룡 화석을 보면 대부도는 7천 만 년 전 공룡이 번성하던 중생대 이후로 화산이 폭발해서 형성된 섬이라고 한다. 지금은 안산에는 볼 만한 곳을 잘 정리해주는 대부해솔길이 있다. 


대부도는 석양을 가슴을 담는 곳이다. 석양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만남과 이별, 사랑, 죽음도 우리 삶에서 순식간이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 만나고 보고 사랑하고 도와주는 사람이 소중한 것이다. 

다문화방송신문 발행인 동국스님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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